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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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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독립운동 결과ㆍ연대표

    학생독립운동 결과ㆍ연대표입니다.

    ▶학생독립운동 결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와 나주간을 통학하던 한 · 일 학생간의 충돌을 계기로 11월 3일 폭발하였다. 광주지역 중등학교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로 시작된 이 운동은 일제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맹휴투쟁 단계에서 집단적인 가두투쟁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나아가 11월 12일의 제2차 시위는 신간회 광주지회 및 전남청년연맹 광주청년동맹 등 광주사회 청년단체와 연계하여 학생 투쟁지도본부의 지도 아래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제2차 시위 직후 일제는 12월 27일까지 보도통제를 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해 보도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나 광주에서 타오른 불길은 먼저 인근 전남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이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학생시위의 전국적 확대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2월 초순과 이듬해 1월 중순 두 차례 걸쳐 일어난 서울에서의 대규모 학생시위였다. 서울에서의 제1차 시위가 이루어지는 데에는 조선청년총동맹과 중앙청년동맹으로 이어지는 청년단체 조선학생전위동맹과 중앙청년동맹으로 이어지는 학생단체의 역할이 컸다.

    한편 신간회에서 기도한 민중대회도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에 그치고 말았으나 학생시위의 전국적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철통같은 경계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930년 1월 개학하자마자 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에서의 이 제2차 시위는 비교적 타격을 덜 받았던 여학생과 여성단체인 근우회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제1차 시위와 마찬가지로 연합투쟁의 형태로 조직적으로 전개된 측면이 강하였다.
    학생시위는 12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확산하여 개성 · 인천 · 원산 · 평양 · 함흥 · 공주 등 주요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으며 1월 중순부터는 도시지역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확산되고 중등학교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확산되고 중등학교학생뿐만 아니라 보통학교학생까지 참여하였으며 투쟁의 형태도 시험거부 · 백지동맹 · 동맹휴학 · 격문살포 · 교내시위 · 가두시위 등 다양해 졌다.
    또한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초기에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학생의 자치권 획득 등 학내문제 해결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과 민족동화교육의 철폐를 주장하던 데에서 총독부 폭압정치 반대·일본제국주의 타도 등 일본 식민지 지배권력과의 전면 충돌을 통한 민족의 독립획득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며 그 방안으로 협동전선을 통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유기적 연결을 도모하고 국제정세까지 포함하여 보다 폭넓은 시야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지역이 지방 청년동맹과 신간회 · 근우회 지회 등 그 지역사회 청년단체와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의 투쟁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해외로까지 파급되어 만주, 일본을 비롯하여 연해주, 미주지역까지 호응하였다.

    비록 1930년 3월 1일 3 · 1운동 11주년을 맞아 일제의 대대적인 사전 검거령에 따른 탄압으로 인해 불꽃처럼 타오르던 학생들의 시위가 한 단계 수그러들었지만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학생들의 항일민족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모두 194개교(전문학교 4개교 중등학교 136개교 보통학교 54개교)가 참여하였으며 참가학생 수는 5만 4,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광주 지역에서만 17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았다. 실형을 받은 사람이 전국적으로는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고 있지 않다.
    또한 533명의 학생이 학교로부터 자진 퇴학하였다. 아울러 233명이 무기 정학처분을 받았으며 298명이 강제로 전학하고 172명이 해외유학을 떠났다. 여기에 더하여 광주사범학교는 일제에 의해 1931년 3월 폐교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명실공히 3 · 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세계 대공황기와 맞물리면서 이후 학생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항일민족운동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대공황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30-31년에 학생들의 동맹휴학이나 노동자들의 파업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참가 인원에서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는 항일민족운동이 전 부문에 걸쳐 대중투쟁이 극도로 고양되었음을 의미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재판을 받거나 퇴학을 당한 학생들과 이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 가운데 상당수가 1930년대 초반부터 직접 청년 · 노동 · 농민 운동에 뛰어들어 민족해방운동의 각 부문에서 활약하였던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장재성과 왕재일도 국내외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비록 1930년대 중반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 조선이 전시동원체제로 재편되어 탄압이 극도로 가중되었지만 학생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반제 · 반전 비밀결사의 형태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더욱이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하는 1940년대에도 학생들은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며 오히려 무장대를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벌이거나 독립을 준비하며 실력을 양성하였다.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의 하나였던 광주서중학교 학생들은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무등회를 조직하고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는 동시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차별정책에 대항하여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라는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학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 · 운동세력이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이념적으로 일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 · 사회주의 등 당시의 다양한 사상들이 중첩되어 전개되었으며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해방이 된 뒤에도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5 · 18광주민중항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운동을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조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지배가 조선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조선을 근대화시켜 주었다고 떠들고 있다. 그러면 왜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은 그렇게 고마운 일본에 대해 결사적으로 항쟁을 하였는가? 왜 보통학교의 어린 학생들까지도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였던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그때 가면 이 운동도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더욱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소중한 경험은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심한 분단의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여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학생독립운동 연대표


    연    대 내    용
    1920년대 초항일학생운동(동맹휴학 등)의 전국확산(404건)
    1924. 6. 1 1차 동맹휴학(3개월간)
    1926.11. 3 항일결사조직 <성진회> 결성
    1928. 6.26 식민지 노예교육 항거 3차 동맹휴학(5개월간), 징역 8명, 퇴학 27명, 무기정학 281명
    1929. 6. 독서회 중앙본부 결성 항일운동 전개
    1929.11. 3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5개월간)(전국 244개교, 54,000명 참가. 구속 1,462명 퇴학·무기정학 2,912명)
    1941.12. 서중 무등회 결성 항일운동 전개
    1943. 5.20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징역 22명 퇴학·무기정학 190명)
    1953.10.20 국회에서 학생의날 제정
    1954. 6.10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준공
    1959.11. 3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록영화 ‘이름없는 별들’로 재현
    1997.11. 3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 역사관, 기념공원 건립
    1999. 4.30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상지 광주광역시 문화재지정(기념물 제26호)
    1999.11. 3 광주학생독립운동 70주년 기념행사(전국규모)거행(김대중대통령, 학생독립운동 참여학교 기수단(63개교)참석)
    2006. 2. 9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명칭 변경 결의안 국회 통과

    ▶학생독립운동 관련 재판 알림표


    구분 연도(년) 인원(명) 대상
    광주농업학교 맹휴사건 1928 5 송성수 등
    광주고보 맹휴사건 1928 9 최규창, 김기권 등
    광주고보 선전문서 인쇄배포 1928 8 이경채, 강해석 등
    목포상업학교 시위사건 1928 18 최창호 등
    나주농업보교, 나주보교 삐라사건 1929 5 유찬옥 등
    보안법 관련 사건 1929.11.03 24 김향남 등
    광주고보 교장실 습격사건 1929 4 김몽길 등
    광주고보 맹휴 반주동자 제재사건 1930 7 주재성 등
    성진회(예심종결문, 판결문) 1929 38 왕재일, 장재성 등
    독서회중앙부(예심종결문, 판결문) 1929 70 최규창, 장석천 등
    광주욱여고 소녀회 사건 1930 11 장매성 암성금자 등
    경성 보성고보 독서회사건 1933 1 강문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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