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로그인 회원가입
  • 학생독립운동
  • 발발 및 파급
  • 학생독립운동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독립운동 발발파급

    학생독립운동 발발 및 파급내용입니다.

    ▶학생독립운동 발발


    1. 광주지역의 비밀결사와 동맹휴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던 광주지역은 다른 어떤 지역 못지않게 학생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곳이었다. 성진회와 독서회 중앙부는 이 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학생 비밀 결사 조직이었다.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왕재일․ 장재성과 광주농업보통학교 학생인 박인생 등이 제안하여 1926년 11월 3일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왕재일‧장재성‧최규창‧안종익․김광용․김창주‧임주흥‧정우채‧채영석과 광주 농업학교 박인생‧정남균‧정동수‧정종석․ 김한필‧문승수 등 모두 15명의 학생이 모여 결성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차별교육에 저항하는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사상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들이다. 모임의 명칭은 왕재일이 제안한 ‘깨달아 나아가자’는 뜻의 성진회(醒進會)로 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강령을 채택하였다.

    1. 일제의 굴레에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
    2.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은 절대 반대한다.
    3.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독서회 중앙부는 1929년 6월 중순 동경 중앙대학 예과에 유학했던 장재성이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광주고보의 김상환․김보섭․윤창하, 광주사범의 송동식․강달모, 광주농고의 조길룡․김순복 등과 광주 양림리(지금의 양림동)에 있는 김기권의 집에 모여 결성하였다. 장재성은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한 뒤에도 방학 때마다 돌아와 성진회 회원들에게 사회과학을 지도하였으며, 1928년 광주고보 맹휴 때에는 ‘동경 유학생 모교 분규 사건 대책 강구회’ 특파원 자격으로 귀국해 맹휴 투쟁 깊숙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런 그가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각 학교의 핵심회원들에게 분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활동들을 조직적으로 단결하여 할 것을 종용함으로써 독서회 중앙부가 만들어졌다. 1920년대 민족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성진회와 독서중앙회가 주도하는 동맹휴학을 통한 투쟁 역량을 바탕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2.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폭발
    1929년에 들어와도 학생들의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발발하였다. 당시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은 일제가 호남지역의 농산물을 쉽게 약탈해 가기 위해서 척도노선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1929년 당시 광주의 인구가 약 3만여 명 정도였는데 광주로 통학하던 학생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전체 중학생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나주․송정리 방면은 일본인 학생 수가 많아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일찍이 일본인들이 진출해 있었으며 토지수탈을 위한 동양척식회사의 이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는 하층에 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와서는 총독부의 지원과 수탈을 통해 1인당 평균 1만평에 가까운 토지를 소유하는 등 재산을 축적할 수 있어 자녀들은 광주에 있는 학교에 통학시켰다. 일제의 수탈과 멸시를 몸소 체험하면서 자랐던 한국인 학생들과 일제 식민권력의 우산 아래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던 일본인 학생 사이에는 항시 갈등과 마찰이 있었으며 이것이 쌓여오다 결국 폭발해 버렸던 것이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를 출발한 통학열차가 오후 5시 30분 나주역에 도착하였다. 통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출구로 나오는데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 후쿠다․스에요시․다나카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암성금자․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들은 기차 안에서부터 이 여학생들을 희롱했었는데 기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계속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역을 나오자마자 후쿠다를 불러 세우고 따졌다.

    “후쿠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뭐라고? ‘센징’인 주제에 뭐라고 까불어”

    ‘센징’이란 말이 후쿠다의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은 그의 얼굴로 날아갔다. 센징은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모욕적으로 부를 때 쓰는 말이었기 때문에 억눌렸던 민족감정이 폭발했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난투극을 벌이고 급기야는 역 광장에 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패싸움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한국인 학생은 30여 명으로 50여 명의 일본인 학생에 비해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사기에서는 일본인 학생이 울분과 악에 받쳐 있는 한국인 학생에 비할 바가 못 되어 부상자는 일본인 학생이 더 많았다.

    마침 그곳을 순찰 중이던 나주역 파출소 순사 모리다가 달려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박준채의 따귀를 때리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같이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여 사태가 심각해지자 모리다는 주춤하여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이날은 일단 이렇게 끝났다. 이튿날인 10월 31일 아침, 광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때를 지어 몰려와 박준채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었다.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 옆 차에 타고 있던 광주고보 학생과 광주농고 학생들이 몰려와 대치하였으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오후 5시 광주를 떠나 송정리로 가던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생, 광주중학생 사이에서 결국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인 차장이 달려와 싸우던 학생들의 통학승차권을 압수하고 박준채와 후쿠다, 그리고 2~3명의 한국인 학생을 2등 칸에 있는 차장실로 끌고 갔다. 2등 칸에 있었던 광주일보 일본인 기자와 일본인 승객들은 “센징인 주제에 건방지다”, “센징 학생들이 잘못했다.”는 등의 폭언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두둔하여 한국인 학생들의 반일감정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학생독립운동 파급


    1.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파급
    광주에서 타오른 불길은 제일 먼저 인근 전남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며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확립하고 나아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것은 광주지역 학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보도통제로 인해 다른 지역은 떠도는 풍문으로만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만 전남지역의 학생들은 인편을 통해 상세히 사건의 경과를 알 수가 있었다.
    광주에서의 대시위에 호응하여 제일 먼저 시위가 일어난 학교는 목포상업고등학교였다.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이어 나주농업보습학교 · 나주보통학교 · 영산포보통학교 · 송정리공민학교 · 함평농잠보습학교 · 강진대구보통학교 · 창평보통학교 · 여수수산학교 · 옥과보통학교 · 담양보통학교 · 보성보통학교 · 순천농업보습학교 등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나아가 시위 계획은 학생뿐만 아니라 사회·청년운동가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져 3월 1일에는 함평청년동맹 위원장과 청년동맹원 3명이 격문을 등사하다 발각되어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길은 광주에서 전남지역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역적 확산 뿐만 아니라 참여층의 확산, 조직력의 확산, 운동이념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조선청년총연맹 · 중앙청년동맹 · 조선학생과학연구회 · 근우회, 신간회 · 천도교 등 종교단체 ·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는 청년사회운동가들이 학생들과 연계하여 1929년 12월에 1차 대규모의 동맹휴학 · 항의집회 ·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각 학교의 휴교에 이은 겨울방학으로 일단 소강상태로 들어간 학생들의 투쟁의지는 해를 넘긴 1930년대에 들어와 더욱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30개에 가까운 학교에서 3,000여 명이 넘는 학생이 참여한 제 2차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두차례에 걸친 서울에서의 시위를 계기로 학생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 1월 중순부터는 도시지역뿐만 아니라 읍 · 면 단위 지역 중등학교학생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 학생까지 참여하였으며 투쟁의 형태도 시험거부 · 백지동맹 · 동맹휴학 · 격문살포 · 교내시위 · 가두시위 등 다양해졌다.

    1930년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운동은 다음표와 같다.

    [표1] 서울 각 학교의 상황(1930. 1. 8)
    학교명 출석자 결석자 결석률(%)
    협성실업학교 192 62 24
    숙명여고보 414 35 8
    제일여고보 344 22 6
    제일고보 769 59 7
    청년학관 116 96 45
    동덕여고보 201 29 13
    도립상업학교 433 25 5
    법학전문학교 120 73 38
    중앙고보 531 171 24
    배화여고보 206 13 6
    휘문고보 668 134 17
    제이고보 631 63 9
    중동학교 1044 509 33
    양정고보 389 121 24
    보성고보 544 153 22
    배제고보 690 60 8
    이화여고보 286 26 8
    선린상업학교 199 10 5
    남대문상업학교 230 44 16
    합 계 8,007 1,705 16


    2. 해외로의 파급
    학생들의 투쟁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해외로까지 파급되어갔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간도 지역의 호응이 가장 컸다. 이 지역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알게된 것은 12월 하순 경으로 방학으로 귀향했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와 소식을 전하면서였다.
    그리하여 1월 22일 길림 연길한인학우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널리 알렸으며 드디어 28일 용정 은진중학교를 시작으로 동아학교 · 동흥중학교 · 대성학교 · 명신여학교 · 동흥소학교 · 숭신학교 · 중앙학교 · 신흥학교 · 약수동학교 · 구룡평학교 · 용정광명학교 · 현립제1학교 등에서 격문을 뿌리거나, 만세시위가 일어나 수많은 학생들이 공안국에 잡혀갔다.
    이처럼 간도지역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동조하는 시위운동이 주로 벌어졌다면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각종 독립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길림에서는 국내 운동에 호응하여 재만 한인 반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상해에서는 국내 학생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상해에 있는 각 단체 대표들이 모여 임시 각 단체연합회를 조직하여 조선학생운동을 지원하고 진상을 세계에 알려 각국의 동정을 환기시킬 것 등을 결의하였다. 한편 일본 동경에서는 동경유학생학우회의 주최로 조선인 학생 200여 명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다 190여 명이 경찰에 잡혀가고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이 모임을 가지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70여 명이 검거되었다. 오오사카에서는 오오사카 유학생학우회와 오오사카 조선노동조합 등이 항의집회를 갖고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항의문을 발송하였다. 이밖에 러시아와 미주 지역에서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신문에 게제하거나 시위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비판하는 등의 호응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파급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계승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항일민족운동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에 학생운동이 활발해졌을 뿐 아니라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광주고보의 후신인 광주서중학교의 후배들이 선배들의 광주학생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직접 항일민족투쟁에 나섰다. 이른바 “제2차 광주독립운동”이라 불리는 무등회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학생들의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7년 2월 광주고보 5학년생이었던 송홍호는 같은 학교 이규석, 최규원, 광주농업학교의 최석두, 최동섭, 홍태진 광주여고보의 김인순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농촌 계몽과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책들에 관해 토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문맹자에 대한 계몽운동 등을 펴 나갔다.
    이 독서회는 이듬해에 발각되어 51명이 검거되었으나 다행히 모두 기소유에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어 광주고보가 광주서중학교로 명칭이 바뀐 해인 1938년 5월 기환도 · 나금주 · 주하준 등이 중심이 되어 다시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독서발표는 간디라는 별명을 가진 기환도가 주로 큐리부인 · 간디전 등 조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라의 위인전기에 대해 하였는데 장소를 바꾸어 가며 행해진 이러한 독서와 토론과정을 통해 회원들은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무등회는 이 독서회를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1939년 5월 기환도 · 나금주 · 주하준 · 유몽룡 · 남정준 · 주만우 · 강한수 등이 결성하였다. 기밀유지를 더욱 철저히 하기 위해 완전한 비밀결사로 조직을 바꾼 것이다. 회의 이름인 무등은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므로 행동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1. 서중혼으로 무장하고 영웅적인 선배들의 얼을 전교 학생들에게 심어줄 것.
    2. 일제식민지 정책 반대투쟁에 젊음을 바칠 것.
    3. 주체성을 기르기 위해 독서 운동을 전개할 것.
    4. 동지를 위해 보안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길 것.

    이들의 활동은 학교 일상생활의 공간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강당 뒤나 운동장 구석진 곳 또는 무기고 뒤나 온실 안 등 학교 당국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삼삼오오 모여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의 선배들의 영웅담과 임시정부의 활동과 일제의 식민지 차별정책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반일 감정을 북돋았다. 무등회는 기환도 · 주하준 · 나금주 등 일부 회원들이 졸업하게 되어 송별회합을 갖는 것을 계기로 1940년 3월 재정비 회합을 가졌으며 1941년 12월 유몽룡 · 주만우 · 남정준 · 강한수 · 윤재춘 · 윤봉현 · 기원흥 · 김동수 등이 모여 다시 재정비 강화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지를 규합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 사이 연락 책임을 맡았던 유몽룡이 매주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장에 일제의 식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적었다가 문제가 되어 퇴학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무등회는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주만우가 담양 무정보통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조선인 동료 교직원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인 교사의 밀고로 검거된 것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 1942년 1월 우몽룡 · 강한수 · 남정준 · 윤봉현 · 윤재춘 · 김동수 등이 구속되었으며 만주로 도피하던 기원흥도 잡혀와 구속당하여 그해 12월 재판에서 유몽룡은 징역 1년 6개월 주만우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제 1차 무등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무등회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조직이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1942년 5월 신균우 · 기영도 · 박화진 · 배종국 · 이민수 · 오복렬 · 조병대 · 박하주 등 20여 명이 모여 무등회를 재건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까지 구상하였다. 학교 교련 교육이 부당하더라도 장차 독립의 시기가 도래할 때 반드시 필요하므로 현재의 고통을 참고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제의 군사교육을 역이용하여 무력항쟁의 수단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기영도는 또한 독립한지 1주일만에 독일에 멸망한 폴란드의 예를 들며 조선이 독립을 했을지라도 영구히 독립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질문에 대해 “조선의 독립과 독립후의 국가경영은 가능하다 우리 청소년들은 철학 · 경제 · 정치 · 사상 등의 문제에 대해 부단히 연구를 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조선민중에게 선전, 선동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가능하다 우리는 극력으로 실력양성에 노력하여 독립목적의 완수에 매진하자”고 하여 독립의 시기가 도래하기까지 실력 양성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박화진은 조선민중이 일제히 봉기하는 시기까지 서중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주입시켜 그들을 독립투사로 만들어 나가는 것을 무등회의 당면 임무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무등회원들은 우선 일제의 민족어 말살정책과 식민지 차별정책을 학교 내부에서 부각시키며 싸워 나갔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신삼용은 내선일체 교육에 광분하였던 에노모도 교장 배척 운동의 일환으로 교장의 얼굴을 독사로 그려놓고 거기에다 “조선어를 상용하자”라고 쓴 희화를 변소와 창고 복도 등의 구석진 곳에 붙여 놓았다가 들통나 경찰에 구속되어 퇴학당하였으나 무등회 활동이 탄로 나지는 않았다. 또한 조병대는 봉안전에 있었던 일본 천왕부부의 사진액자에 지렁이를 집어넣어 기어다니게 하고 군국주의를 신봉하여 차별을 일삼는 일본 교관의 책상 서랍에 인분봉투를 넣어 학교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하급생들 사이에 친일적인 분위기가 성행하자 신균우 · 배종국 · 박화진 등 무등회의 중심 회원들은 1943년 4월 본격적인 교풍 쇄신운동을 벌여 점심 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활용하여 하급생들의 교실을 순회하면서 항일 운동의 필요성과 조선어 사용을 강조했다. 그런데 4학년 하급생의 밀고로 주동자들 몇 사람이 교장실로 불려가 심한 욕설과 체벌을 당한 계기로 혐의가 있는 하급생을 학교 무도장 뒤에 집합 시켜놓고 체벌을 가하였다. 이 사건이 있자 경찰은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으며 학생들은 이에 맞서서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내걸고 5월 21일을 기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1. 일어사용 반대.
    2. 창씨개명 반대.
    3. 내선일체 반대.
    4. 일본상품 불매.
    5. 차별교육 반대.
    6. 조선독립 만세.

    당황한 학교측에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전교직원이 거리로 나가 학생들의 등교를 종용하였으며 경찰들은 비상 출동하여 맹휴 주모자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맹휴가 일어난 며칠 뒤 광주사범학교에서 열린 전남도내 모형 비행기 대회를 관람한 일부 서중학교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을 구타한 것을 계기로 일제히 검거 선풍이 불어 그해 8월까지 4개월에 걸쳐 350여 명이 잡혀갔다. 검거지역은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 평양 · 동경 · 봉천 · 하얼빈까지 미쳤으며 졸업생들도 모조리 끌려와 광주경찰서에서 모두 수용할 수가 없어 나주 · 화순 · 담양 등 인근 지역의 경찰서와 주재소까지 분산 수용되었다. 일제는 다음 해인 1944년 2월까지 장기간 조사를 하면서 30여 명을 구속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21명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고 10여명이 재판을 받아 다음과 같은 형을 받았다.

    ◈ 남정준 : 징역 2년
    ◈ 기영준 · 신균우 :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
    ◈ 기원흥 · 배종국 : 징역 1년 6개월
    ◈ 박화진 · 오복렬 · 조병대 :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5년
    ◈ 박하주 · 이민수 :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

    일제 조사 과정에서 관련자 모두에게 악독한 고문을 가했다. 기환도는 수갑을 채운 채 심야에 경양 방죽으로 끌려가 물 속에 쳐 넣어 발길질로 채이며 고문을 당하다 갈비뼈가 여러 개 부서지는 증상을 입고 죽음을 당하였으며 강한수와 윤봉현도 재판을 받기 전에 잔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 주만우는 형을 살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고문치사를 병사로 조작하여 상부에 허위보고 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이기도 하였다. 구사일생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방이 돼서야 풀려 나왔다. 이것이 소위 ‘제2차 무등회 사건’이다.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에도 선배들의 항일독립정신을 이어받은 광주서중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어 이 학교 3학년생이었던 문병갑은 주위의 동급생을 중심으로 반일 시국담을 유포하여 일제 패전의 실상을 알리다가 반일 민족주의와 패전주의적 사상을 전파하였다는 이유로 1944년 6월 체포되어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