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작성일 : 10-03-21 16:28
중고생을 위한 광주학생독립운동 요약
 글쓴이 : 지킴이
조회 : 1,528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투쟁운동.

운동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 운동의 발단과 결과 및 전국의 학생운동에 끼친 영향 등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3 ·1 운동 이후 일제는 한민족의 항일의식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문화정책을 펴 나갔는데, 표면적으로는 이전의 무력적 탄압에 비하여 너그러운 듯하나, 사실은 한민족의 반항정신을 소모시키는 가장 지능적인 통치방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전세계를 휩쓴 사회주의 사상이 한반도에도 유입되어 한때 사회주의적인 계급투쟁에 의하여 민족주의적인 독립운동이 수세에 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당면의 적(敵)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었으므로 두 진영이 협력하여 1927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정세 속에서, 항일운동의 근원지인 호남지방에서 1928년 4월 16일 광주 송정리(松汀里) 항일격문사건(抗日檄文事件)이 일어났고, 4월 28일 전북기자대회사건(全北記者大會事件)이 발생하였다. 이어서 6월 2일 이리(裡里)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습격계획이 탄로되었고, 8월 5일 전남 소년연맹결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보다 앞서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재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단체인 성진회(醒進會)가 왕재일(王在一) ·장재성(張載性)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다.
그런데 성진회는 재학생 중심으로서 간혹 이반자(離叛者)가 생겼다. 따라서 1927년 10월 해산하고, 11월 같은 회원들을 중심으로 독서회 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를 결성하였다. 이 독서회에는 각 학교의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과 신간회 등의 사회단체들까지도 참여하였고,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광주여고보(光州女高普) ·목포상업학교의 독서회가 가입되어 있었다.

성진회나 독서회 중앙본부는 항일투쟁 단체로서 총독부에 대하여 식민지교육을 즉각 중지하고, 각급 학교에서 한국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며 사회과학연구를 활발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관철하기 위하여 여러 학교에서 동맹휴학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이리하여 각 학교에서 1926∼28년 여러 차례 동맹휴학 사건이 일어났다. 식민지 교육을 지양하고 한국인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라는 학생들의 요구에 대하여 학교 당국과 도(道) 학무과 등에서는 요구조건의 수용없이 학생들을 정학(停學) ·출학(黜學) ·퇴학시켰고, 나아가 체포 ·구속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각지의 학교에서 겪은 공통적인 고난이었으나, 불의(不義)에 항거하여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호남인 기질 때문에 충돌은 언제나 격렬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험악한 정세하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 발단과 결과

1929년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이며, 일본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기도 하고 또 전신인 성진회의 창립 3주년 기념일이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0월 30일 오후에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羅州驛)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朴己玉) 등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朴準埰) 등이 후쿠다를 후려치자 학생들 사이에 편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11월 1일에도 계속되었으나, 2일 하루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3일 오전 11시경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 간에 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광주고보 학생 중 일부는 일본 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어 신문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여 그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개인 간의 감정적 충돌이던 것이 학교와 학교 사이의 충돌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전호남일대의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의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격려하고 후원하였다. 학교와 경찰에서는 달래고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써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탄압정책을 강화하여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학생들을 구속하였다.
그 결과 광주의 신간회지부 ·청년단체 ·사회단체 등은 혼연일체가 되어 투쟁의 전국적 확대에 힘썼고, 학생들을 항일독립운동의 전위대(前衛隊)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 청년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장석천(張錫天) ·장재성 ·강석원(姜錫元) 등은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설치하고, 광주 투쟁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활동을 개시하였다. 11월 7일 이후 회합을 거듭한 끝에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 장재성은 광주 한국인 학생의 행동지도, 국채진(鞠埰鎭)은 전남 각 지방 학생의 지도, 박오봉(朴五鳳)은 노동자 및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林鍾根)은 전남 각 공립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동지(外來同志)와의 연락, 나승규(羅承奎)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지도업무를 분담하였다.

학생들의 불 같은 투지와 학생투쟁 지도본부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광주학생운동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비약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고, 11월 12일 제2차 투쟁이 전개되었다. 전날까지 인쇄한 격문을 가지고 등교한 각 학교 학생들은 9시 반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운동에 돌입하였다. 학생들이 뿌린 격문은 4종류였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검거된 학생들을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② 경찰의 교내 침입을 절대 반대한다.
③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④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⑤ 직원회에 학생대표를 참가시키자.
⑥ 한국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⑦ 식민지적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⑧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⑨ 전국 학생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

2. 전국학생운동에 끼친 영향

제2차 광주학생 가두시위 이후인 12월 2일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중요 공·사립학교와 시내 곳곳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이 살포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경성 제2고보·경성 제1고보·경신학교(儆新學校)·보성고보(普成高普)·중앙고보(中央高普)·휘문고보(徽文高普)·협성실업(協成實業)·청년학관·배재고보(培材高普)와 이화여고(梨花女高)·동덕여고(同德女高)·실천여학교(實踐女學校)·경성농업·법정학교(法政學校)·고등예비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善隣商業)·
배화여고(培花女高)·진명여고(進明女高)·정신학교(貞信學校)·간이상공학교(簡易商工學校) 등이 가두시위 또는 동맹휴학 등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개성·부산·진주·청주·공주·대전·홍성·예산·조치원·부여·전주·정읍·고창·이리·평양·신의주·정주(定州)·선천(宣川)·영변(寧邊)·함흥·원산·경성(鏡城)·회령·청진·대구·춘천·해주·사리원 등 각지로 번져 수많은 학교가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궐기하였다. 전국 각지의 거의 모든 학교가 참가한 이 운동에는 194개교의 학교와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였으며, 그 중 580여 명이 퇴학처분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體刑)을, 2,330여 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젊은 학생들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이 다시 한번 분출된 독립운동사상 격렬하고 힘찬 운동이었다. [이 게시물은 지킴이님에 의해 2012-06-07 16:20:16 자료실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지킴이님에 의해 2012-06-11 10:44:23 언론보도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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