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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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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영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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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박수진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32회   작성일Date 12-06-14 09:48

    본문

    [활동내역]
    전라남도 광주(光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광주(光州)의 작은 장날을 이용하여 김 강(金剛)·김 철(金鐵)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日本東京) 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거사를 청년들에게 알려주니, 최한영·김복수(金福洙)등이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두는 등, 일찍부터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례(參禮)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김 철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 귀향하여, 양림동(楊林洞) 남궁 혁(南宮赫)의 집에서 김 강·최병준·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奉)·한길상(韓吉祥)·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奎)·서정희(徐廷禧)·김태열(金泰烈)·홍승애(洪承愛)등과 회동(會同)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정황을 알려주며 광주에서도 똑같은 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의하여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집에서 최정두·한길상·김용규·범윤두(范潤斗)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태극기·격문·애국가·독립가(獨立歌)등을 밤을 새워가며 만들었으나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서 다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학생과 읍민에게 시위취지를 알리며 거사 참가를 권유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어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이 넘었다. 이때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다음,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만세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일본의 헌병·경찰은 시위대열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시위방해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김 철 등의 주동자를 체포하여 갔다. 이때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서원까지 투입하여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니 시위대열은 무너지고, 그도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註·판결문(1919. 9. 15 대구복심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55·556·55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8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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